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뉴욕 자이언츠 (문단 편집) === [[로렌스 테일러]] & 빌 파셀스의 시대 === [[파일:external/prod.static.giants.clubs.nfl.com/parcells4.jpg]] 파셀스 시대 최고의 스타이자 자이언츠의 영원한 레전드인 로렌스 테일러(56번)와 그의 반대쪽 OLB 콤비였던 칼 뱅크스(58번)에 무동 태워진 빌 파셀스. 1979년에 팀은 여러 대학을 거치며 [[라인배커]] 코치를 맡던 38세 지도자 빌 파셀스(전 [[미국공군사관학교]] 풋볼 팀 감독)를 수비 코치로 영입했고, 레이 퍼킨스라는 평범한 감독 밑에서 수비를 전담하던 빌 파셀스는 점차 자신이 키운 수비 라인맨들의 활약을 바탕으로 입지를 넓히면서 1983년에 감독으로 승진했다. 코치 시절 그의 별명은 '''[[참치|Big Tuna]]'''. 그야말로 선이 굵고 호탕한 마초적인 풋볼 전략으로 팀을 휘어잡는 데 성공한다. 지금이야 재평가되고 있지만 1979년 [[드래프트]]에서는 PAC-10의 패싱 기록을 경신한 [[워싱턴 주립대학교]]의 잭 톰슨[* 여담으로 NFL 드래프트 역사상 최고의 버스트(Bust) 10위에 올라 있을 정도로 형편없는 성적을 내다가 사라졌다. 참고로 이 랭킹의 1위는 같은 워싱턴 주립대의 라이언 리프.] 외에는 마땅한 쿼터백 자원이 없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쿼터백 뎁스가 약한 드래프트였다. 쿼터백의 보강이 급하다고 생각한 조지 영 단장은 자이언츠가 가진 1라운드 7번 픽으로 모어헤드 주립대([[켄터키주]] 소재)라는 듣도 보도 못한 대학에서 어느 금발 쿼터백을 뽑게 된다. 당연히 뉴욕 팬들은 난리가 났고 성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되는데 그 쿼터백이 바로 [[필 심스]](現 [[CBS(미국 방송)|CBS]] NFL 해설자)였고 [[일라이 매닝]]에 의해 다시 깨지기 전까지 팀의 프랜차이즈 패싱 기록을 모두 경신하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를 새로 맡은 빌 월시 감독 역시 필 심스를 주목하고 있었는데 예상 외로 자이언츠에서 1라운드 지명 픽을 이용해서 뽑아가버리자 2라운드에서 빼빼 마르고 키가 작은 쿼터백 [[조 몬태나]]를 대신 뽑게 된다.] 이 당시 빌 파셀스의 코칭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Power Football Is Winning (tool)''''. 공격에서는 파워백을 이용하여 러쉬 위주의 공격을 통해 공의 소유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고 대신 수비에서는 수비 라인과 라인배커진에서 상대편의 러싱을 최대한 봉쇄하는 전략을 일관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당시 자이언츠의 수비진에는 시야가 넓고 민첩한 인사이드 라인배커인, 이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해리 칼슨이라는 우수한 인사이드 라인배커가 있었지만 또 한 명의 프로볼 아웃사이드 라인배커인 브래드 반 펠트는 점점 나이가 들고 있던 상황. 이에 드래프트에서 러닝백과 수비진의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youtube(oWB9ia_ZPjk)] 그 중심에는 1981년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지명했던 뉴욕 자이언츠 역사상 최고의 스타이자, NFL 역사상 최고의 패스러셔로 꼽히는 L.T. [[로렌스 테일러]]가 있었다. 로렌스 테일러는 신인임에도 전 경기를 풀 타임 선발 출장하며 무시무시한 운동 능력[* 체구도 체구거니와 압도적인 스피드로 인해 상대 공격 라인맨들이 막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서 상대 쿼터백이 치핑블록(러닝백이나 풀백이 보디체크 같은 형식으로 상대 패스러셔의 타이밍을 흐트려놓는 기술)을 해야 할 정도였지만 그것마저도 뚫었을 정도.]과 테크닉을 바탕으로 상대 공격 라인맨과 쿼터백을 그야말로 압살하는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이에 빌 파셀스는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미식축구 수비의 주류라고 보기 어려웠던 [[3-4 디펜스]]를 로렌스 테일러 중심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로렌스 테일러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자이언츠가 경기 중 오펜시브 라인맨이었던 브래드 벤슨이 파울을 범해 절호의 기회를 무산시키자 전반전을 끝내고 라커룸으로 향하던 파셀스 감독은 "벤슨 저 C 8 XX, 들어가면 아주 죽여버릴 거야!"라고 울화통을 터뜨리자 선수 중 한 명이 그를 보고 "걱정 마세요, 테일러(로렌스 테일러)가 먼저 잡아먹으려 할 걸요."라고 했다고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기까지만 해도 수비 라인맨의 닥돌은 이 시기까지 미식축구 공격의 중심이었던 __공을 들고 뛰는 러닝백의 저지에__ 맞춰져 있었다. 공을 들고 뛰는 일이 러닝백이 더 많았기 때문. 하지만 2년 전 [[조 몬태나]]의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가 선보인 [[웨스트 코스트 오펜스]]의 시작과 더불어 선수들의 기술 발전과 환경 변화로 인해 점차 쿼터백의 패싱 전술이 늘어나면서 쿼터백의 볼 소유 시간이 더욱 늘어났고, 이에 맞추어 수비 전략 역시 러닝백보다는 우선 공을 잡고 패스를 던지는 '''쿼터백을 직접 때려잡는 걸 목표로 하자'''는 수비 발상의 전환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패스러쉬]]의 개념. 그러다 보니, 수비 라인맨의 중심인 수비 태클이 쿼터백을 직접 쓰러뜨리기엔 항상 최대 3명(가드 2+센터)을 마주치는 태클에게는 이 역할을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빌 파셀스는 3-4 디펜스를 통해 중앙에 3명을 두고, 이전까지 러닝백의 측면 돌파나 짧은 패스저지 정도의 역할만 부여되었던 3-4 디펜스의 아웃사이드 라인배커를 전진 배치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로렌스 테일러라는 리그 최고의 운동 능력과 떡대를 가진 수비수를 세우고 패스러쉬 역할과 프리롤을 주어, 테일러가 스냅하자마자 상대 공격 태클과 1 대 1 맞대결을 걸어 실력으로 제치고 공을 든 쿼터백을 직접 제압하는 수비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현대 미식축구에서 매 스냅마다 리플레이로 등장하는 '수비 팀 최고의 패스러셔 vs 공격 팀 주전 레프트 태클'의 몸싸움 맞대결 구도[* [[https://www.youtube.com/watch?v=EA0FffrQw8w|이런 거친 몸싸움이 경기 내내 쿼터백 등 뒤에서 일어난다는 뜻이다.]] 쿼터백은 대부분 우완이기 때문에 공을 받아들고 패스를 하는 동작을 취하다 보면 쿼터백의 등이 왼쪽을 향한다. 즉 왼쪽이 [[사각지대]]가 되는 셈. 그런 관계로 공격 팀의 레프트 태클은 저길 노리고 달려드는 수비 라인맨에 맞서 쿼터백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 것.]를 처음으로 만들었던 게 바로 빌 파셀스이다. 전방에 3명의 D라인맨이 있는 3-4 디펜스 특성상 공격 팀 라인맨이 태클에게 함부로 더블 팀을 붙일 수 없어서 상대 팀은 울며 겨자 먹기로 테일러를 태클 1명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테일러는 파셀스의 기대에 부응하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매 경기 상대 레프트 태클을 농락하면서 뚫고 들어와 상대 쿼터백을 무자비한 태클로 박살내는 대활약을 보였고, 이런 하이라이트 장면을 만드는 것에 주목해 1982년 NFL은 수비수가 쿼터백이 패스를 던지기 전 태클하는 기록을 특별히 '쌕'으로 분류하여 공식 기록화하기 시작했다.[* 쌕이라는 개념의 고안은 1961년 NFL에 데뷔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역사상 최고의 수비 태클 중 1명이자 패스러쉬 개념의 시작을 제시한 디콘 존스([[로스앤젤레스 램스]])가 최초였다.] 빌 파셀스는 이러한 수비의 완성을 위해 수비 태클 짐 버트에 1983년 드래프트에서는 로렌스 테일러의 영혼의 단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수비 엔드 레너드 마셜[* 1990년 [[NFC]] 챔피언십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쿼터백 조 몬태나가 그야말로 개발살냈던 맹활약(?)으로 유명했다. 여담으로 여기엔 사연이 있었는데 당시 자이언츠의 주전 쿼터백 필 심스가 정규 시즌 버펄로 빌스전에서 큰 다리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고 백업인 제프 호스테틀러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는데, NFC 챔피언십에서 공교롭게도 포티나이너스로 이적한 과거의 팀 동료 짐 버트(앞의 그 사람과 동일인 맞다)의 과격한 태클에 부상을 당해 필드를 겨우 걸어나왔기 때문에, 한때 동지였던 자이언츠 수비수들의 꼭지가 돌아버린 것. 당시 자이언츠 수비수들은 '''"너희가 우리 쿼터백을 건드리면 너희 쿼터백도 무사 못 함!"'''이라며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 호스테틀러는 다행이 경기를 못 뛸 정도가 아니어서 경기 막판 복귀했고, 15-13 자이언츠의 신승으로 끝났다.]을, 1984년 드래프트에서는 로렌스 테일러의 반대편에서 수비진을 압박해 줄 수 있는 다재다능한 아웃사이드 라인배커인 칼 뱅크스[* 현재 뉴욕 자이언츠 경기 전담 해설가로 활약 중.]와 파워 있는 인사이드 라인배커인 게리 리즌스를 지명하여, 일명 'Big Blue Wrecking Crew'라는 막강한 [[슈퍼스타]] 군단으로 완성해 상대 공격 라인맨과 쿼터백을 무자비하게 쓰러뜨리며 강력한 수비로 맹위를 떨쳤다. 그리고 그 중심의 로렌스 테일러는 NFL이 쌕 기록을 정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1982년 이후 1986년 NFL 최초이자, 라인배커로서 NFL 최다 쌕 기록인 20.5쌕을 기록하고,[* 단일 시즌 최다 쌕 기록은 2001년 자이언츠의 후배 [[마이클 스트래헌]]이 기록한 22.5쌕이고, 라인배커의 최다 쌕 기록은 2014년 [[캔자스시티 치프스]]의 [[저스틴 휴스턴]]이 기록한 22쌕이다.] 수비수로는 두 번째로 AP [[MVP]]의 영예를 따기도 했다. 수비수로는 역사상 손꼽히는 수비 라인 'Purple People Eaters'의 리더였던 [[앨런 페이지]]가 1971년 최초로 이미 수상한 바 있다. 다만, 로렌스 테일러는 그해 AP는 물론 PFWA, 스포팅 뉴스 MVP 3관왕으로 더 압도적인 포스를 선보였다. 공격진에서도 파셀스의 전략대로 팀을 다시 만들기 위해 거의 4년간 매해 3명씩의 러닝백을 드래프트로 선발했지만 정작 그 성과는 1982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에 지명된 조 모리스가 프로볼급으로 성장하고 나서야 나타났다. 하지만 다소 작은 체격의 스피드를 무기로 한 모리스는 당시의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 라인으로는 파셀스가 원하는 '세 번의 러닝으로 10야드 획득'을 일관되게 해주기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블로킹에 능한 풀백 모리스 칼손을 붙여 주는 것도 모자라 1986년에는 당시 [[애리조나 카디널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올프로 파워백 오티스 앤더슨을 획득한다. 훗날 그는 [[슈퍼볼 XXV]]에서 자이언츠의 우승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수비진과 러닝백에 총력을 기울인 탓인지 부족한 리시버진을 꾸역꾸역 필 심스가 이끌어 나가는 중에서 그나마 No. 1 타깃이 되어 준 것은 1985년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에 지명된 타이트엔드 마크 바바로였다.[* [[실베스터 스탤론]]과 흡사한 외모에 마초 같은 플레이 스타일로 별명이 [[존 람보|람보]]였다. 공교롭게도 이 둘 모두 [[이탈리아계 미국인|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 출신들이었다. 포티나이너스와의 먼데이 나잇 경기에서 포티나이너스 수비수 몇 명을 달고서도 무려 31야드를 돌진했던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전술 이해도와 캐칭 능력에 비해 잔부상이 너무 잦았던, 그야말로 [[유리몸]]인 것이 단점이었던 탓에 이번에는 1986년과 1987년에는 드래프트에서 세 명씩 와이드리시버를 지명한다.[* 이런 물량 작전 끝에도 큰 소득은 없었다. 스테이시 로빈슨이 주전이 되어 주기는 했지만 그다지 1급 리시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물량 작전은 [[슈퍼볼 XXI]] 우승 후에야 루트를 타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마크 잉그램]]을 지명하게 되면서 그나마 한 명 성공하기는 했지만 당시 [[뉴욕 제츠]]가 워낙 드래프트 삽질을 거듭하고 있던 탓에 상대적으로 언론의 비난은 적은 편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 그 와중에도 수비진의 보강도 게을리하지 않아 수비 라인 에릭 돌시, 에릭 하워드,[* 짐 버트가 맡았던 주전 노즈태클 자리를 이어받아 활약했다. 1991년 NFC 컨퍼런스 챔피언십 경기에서 포티나이너스의 러닝백 로저 크레이그를 상대로 [[펌블]]을 시도, 자이언츠에 공격권을 넘겨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던 주역이기도 하다.] 미들 라인배커 페퍼 존슨,[* 본명은 토마스 존슨. 이름이 된 페퍼는 어린 시절 [[시리얼(음식)|시리얼]]에 [[후추]]를 뿌려 먹던 특이한 식성을 보고 그의 할머니가 지어주셨다고 한다. 빌 벨리칙의 코칭 스태프들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코너백 마크 콜린스[* 출신 대학교가 칼스테이트 풀러튼이다. 야구로 유명한 대학이며 1992년에 폐부됐다.]를 보강하여 전력을 더 튼튼히 하나, 1985 시즌에 [[워싱턴 레드스킨스]]와 대결 중 상대 팀 주전 조 타이즈먼이 로렌스 테일러와 쌕 도중 부딪혀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며, 테일러는 은퇴 뒤에도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있다. 그럼에도 1986년에는 슈퍼볼 XXI에서 [[존 엘웨이]]가 이끄는 [[덴버 브롱코스]]와 슈퍼볼을 놓고 일전을 벌이게 되었고, 내내 팽팽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막강한 자이언츠의 수비진에 의한 피지컬한 파상 공세에 엘웨이와 공격진, 공격 라인들의 체력이 떨어지면서 3쿼터부터 급속히 승부의 추가 기울면서 39-20으로 승리, 30년 만에 뉴욕에 챔피언십을 가져오게 되었다. [[파일:Kkah7Uf.jpg]] [* 우승 후 [[게토레이]]가 담긴 통을 코치에게 쏟아붓는 전통도 이때 처음으로 생겨났다. 이 '게토레이 덩킹'은 해리 칼슨의 아이디어였다고.] 이듬해 조 모리스의 부상과 리시버진의 줄부상, 주전 태클이던 칼 넬슨의 [[호지킨 림프종]]으로 인한 결장 등으로 이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탄탄한 수비로 곧 다시 우승 전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자이언츠에 다시 대권 도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걸프 전쟁]]이 한창이던 1991년의 [[슈퍼볼]] XXV이다. 시즌 시작전 주전 코너백이던 페리 윌리엄스는 코너백으로는 스피드가 함량 미달의 판정을 받아 세이프티로 이동, 코너백의 자리가 비어버리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메꾸기 위해 [[댈러스 카우보이스]]에서 방출된 에버슨 월스[* 1981 [[NFC]] 챔피언십 경기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의 타이트엔드 드와이트 클락과의 대결에서 역전 터치다운 패스를 막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미국 내에서 잘 알려진 선수이다.]를 긴급 수혈하는 등 결코 안정적인 스타트는 끊지 못했던 상황이었지만, 은퇴한 해리 칼슨의 빈 자리는 페퍼 존슨이 잘 막아주었고 세이프티 마이런 가이튼 등이 더 보강된 수비진은 리그 최고의 수비 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14주차에 [[버펄로 빌스]]와의 경기에서 주전 쿼터백인 필 심스의 발이 부러지는 사고가 생겼지만 백업이었던 제프 호스테틀러가 이후 NFL 역사상 손꼽히는 명경기로 'End of Dynasty Game'으로 불리는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와의 NFL 챔피언십 게임의 혈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팀은 다시 한번 슈퍼볼에 도전하게 된다.[* 당시 포티나이너스는 1988년, 1989년 2년 연속 슈퍼볼 우승으로 기세등등하게 나가던 팀이었다. 참고로 슈퍼볼 역사상 [[3연패|3연속 우승]]을 이룬 팀은 아직 없다.] 슈퍼볼 XXV의 상대는 당시 껌을 한쪽 입으로만 씹는 모습이 특징적이었던 최고령 마브 레비 감독과 공격 코치 테드 마치브로다가 도입한 노 허들 오펜스[* 다음 공격 작전을 짜기 위해 모이는 일 없이 다음 공격으로 바로 들어가는 전술. 이 전술은 수비수들에게는 엄청나게 고역인 전술인데, 그 이유는 '''수비수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체력 소모가 심한 전술이다.]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을 특기로 하는 [[버펄로 빌스]]. 스포츠 신문이 아닌 국내 신문에서도 창과 방패의 대결로 이례적으로 슈퍼볼 기사가 나올 정도로 정말 극단적으로 반대인 팀 컬러를 가진 두 팀의 맞대결이 성사되어 화제가 되었다. 당시 빌스의 선수진을 보면 쿼터백 짐 켈리, 러닝맥 서먼 토마스, 리시버 안드레 리드, 제임스 롭턴, 타이트 엔드 키스 맥켈러, 공격 라인에 센터 켄트 헐, 태클 윌 울포드 등 그야말로 스타 군단이었다. 수비진에도 수비 엔드 브루스 스미스, 라인배커 코넬리어스 베넷, 쉐인 콘란, 코너백 네이트 오돔스 등이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킥 블럭과 펀트 블럭의 스페셜리스트인 스티브 태이스커, 그리고 시즌 초전에 강풍으로 [[필드 골]] 단 한 개만을 미스하고는 모두 성공시켰던 키커 스콧 노우드까지 있어 그야말로 약점이 없는 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은 주전 쿼터백이 부상 중인 자이언츠보다 폭설이었음에도 AFC 챔피언십에서 [[오클랜드 레이더스|로스앤젤레스 레이더스]]를 무려 51-3으로 대파하여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버펄로 빌스의 우세를 조심스럽게 점쳤지만 파셀스는 그야말로 육탄 수비를 통해 끈적끈적한 저득점 경기로 경기를 이끌고 간다. 경기 내내 진흙탕 중원 싸움이 이어지던 중 4쿼터에 자이언츠가 키커 맷 바의 필드 골로 경기를 20-19로 리드하게 되었고, 빌스는 마지막 공격을 통해 종료 8초 전 역전 필드 골 찬스를 맞았으나 믿었던 키커 스콧 노우드가 실축, 자이언츠는 두 번째 슈퍼볼을 거머쥐게 된다. 당시 TV 중계의 [[캐스터]]였던 [[앨 마이클스]]가 "No Good! Wide Right!"라고 했던 멘트는 [[위키백과]]에 단일 문서로 올라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리고 결정적인 그 필드 골 미스 이후로 스콧 노우드는 1991년에 은퇴하고 말았고, 빌스는 슈퍼볼 XXVI, XXVII, XXVIII에 다시 진출하였으나 모두 패배하여 4년 연속 슈퍼볼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썼다. [[파일:F6FCPYZ.jpg]] 빌스 팬들에게 이 짤은 혐짤이 되고 말았다. 빌 파셀스가 1990 시즌을 끝으로 잠정적으로 지도자 일선에서 은퇴했으나, 1993년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감독으로 복귀해 팀을 슈퍼볼에 진출시키는 등 특유의 파워 러싱 오펜스와 공격적인 3-4 디펜스의 활용이라는 트렌드를 정립해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였고, 파셀스 밑에서 보조 코치로 있던 '''빌 벨리칙''', 이후 자이언츠를 또다시 슈퍼볼 우승팀으로 끌어올린 '''톰 커플린''', 댈러스 시절 QB 코치로 많은 것을 배운 [[션 페이튼]] [[뉴올리언스 세인츠]] 감독 등 여러 제자들을 성공한 NFL 지도자로 만들어내고 NFL 감독계에 이름을 남긴다. [[파일:ApK7lpa.jpg]] 여담으로 이 시기 자이언츠의 헬멧은 최악의 헬멧 디자인 랭킹에서 3위 밖으로 떨어질 일이 없을 정도로 평이 안 좋았다. 심지어는 정말 아무 무늬, 그림 없이 오렌지색만 덩그러니 칠해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헬멧을 제치고 최악으로 뽑힌 해도 있을 정도. 2000년에 이전의 n과 y를 의미하는 로고로 바꾸고 나서야 최악의 헬멧을 가진 팀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파일:k5vsNCO.jpg|width=100%]] || || 역대 뉴욕 자이언츠 헬멧의 변천사.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